악몽 속의 계곡

L.A의 어느 유학생의 고백

“도박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이 말은 5년 동안의 도박을 통해 얻은 결론이다.

이제부터 말하려고 하는 도박의 경험은 결코 특이하지도 않고 흥미로운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금은 내가 벗어난 도박의 구렁에서 아직까지 헤어나지 못한채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에서다.

도박에 대한 병적인 집착의 근원은 유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정확함을 강조하셨던 아버지가 4대 독자로 태어난 나에게 했던 가르침은 항상 일반적이었고 강압적이었다.

이와 반대로 조부모와 어머니에게서는 무한대의 자유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이같이 두 가지 상반된 환경에서 자라게 된 나는 논리적인 사고가 결여되고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행동을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은연중에 집착과 강박관념이 생기게 되었고 내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런 것들은 후에 먼 미국 땅에서 도박이라는 가장 극단적이고 치명적인 행위로 분출되었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충동적인 행위로 인해 불량학생으로 낙인이 찍혔고 그러면서도 병적으로 공부에 몰두해 밤을 새우기도 했다.

대학을 진학한 후에도 집안의 갈등과 이유를 알지 못하는 집착증은 계속되었고 이런 것들을 벗어나려는 생각에서 한국을 떠나 동부의 한 주립대학에 유학을 오게 되어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미국에서의 대학 생활 중에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도박은 그때까지 내생활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몰아서 하는 공부의 덕분으로 샌디에고에 있는 대학원 박사과정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샌디에고에서의 대학원 생활은 나의 삶에서 학업에 가장 열중하던 시절이었고 그 결과로 모든 학생들이 부러워하는 교수의 연구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87년 겨울 친구와 함께 갔던 라스베가스에서의 도박은 젊은 날 5년이라는 긴 세월을 파탄과 고통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같이 간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처음 마주하는 도박의 세계에 나는 1박2일 쉬지 않고 몰두했고 한 푼 없는 빈손에 남아 있는 것은 끝없는 도박의 미련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도박의 광기를 뿜고 있는 나의 내면세계를 처음으로 무섭게 경험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시간은 흘러 해가 바뀌면서 단조로운 학교생활은 연구로 이어져 갔으며, 항상 학생들끼리의 포커 판을 주선하는 것이 나였고 판이 끝날 때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도박판에 가장 열성적으로 미친 듯이 몰두하고 있는 내 모습을 나는 보지 못했다.

당시에는 대학원에서 장학금을 받았고 정기적으로 연구비가 나왔기 때문에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었고 오히려 혼자 사는 나에게는 풍족할 정도였다.

하루는 친구를 방문했다가 갑자기 라스베가스에 가는 것에 동의하여 바로 차를 몰아 공항으로 가서 라스베가스로 향했다. 카지노의 현황한 불빛 아래서 잭팟의 짜릿한 통쾌함을 맛보기는 했지만 결과는 가지고 갔던 2천 달러를 날리고 크레딧 카드에 4천 달러의 빚을 진 것이 전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있어서 라스베가스의 경험은 도박의 피해를 일깨우는 좋은 경험이었을 뿐이다.

그러던 중 88년 7월 학교가 있었던 샌드에고의 인디언 보호 구역에 도박장이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어, 우선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이 도박장 출입을 용이하게 했다.

그해 여름 거의 매일 그곳의 도박테이블에 앉았고 수차례 몇 백 달러씩 부어 넣었던 돈은 바닥이 났고, 그때부터 친구에게 돈을 꾸는 일이 시작되었고 연구는 서서히 나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당연히 붙어야만 되는 대학원 3학년 때 있었던 구두시험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셨고 2학년 박사과정 입문시험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교수로부터 받았던 기대는 한순간에 실망으로 변해 버렸다.

이때부터 학업에 대한 압박감과 재정적인 어려움은 생활의 모든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되었다. 재정적인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한국의 집에 가서 2천달러를 받아 왔지만 LA공항에 내려 바로 커머스 카지노를 가서 모두 날려버렸고 샌디에고에는 다시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89년 접어들면서 친구로부터 유학생 여자를 소개 받았는데 도박과의 인연은 끊이지 않아 그 여자도 도박을 좋아하는 여자였다. 불과 3개월을 만나면서 라스베가스를 3번 같이 갈 정도였다. 나의 이성은 그녀에게 절교를 선언하게 만들었고 머리 속은 낙방한 구두시험의 재 시험에 반드시 합격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녀와의 절교는 후유증만 남았고 그 후유증은 도박장으로 나를 자연스럽게 이끄는 계기만을 주었을 뿐이었다. 시험 이틀 전까지 도박을 했고 그 결과 거의 모든 학생이 통과하는 구두시험에 다시 고배를 맛보았다. 그 당시의 절망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암흑과도 같았다. 학교에서는 나를 더 이상은 받아주지 않았고 다른 학교로 전학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위대한 화학자의 꿈을 안고 온 미국 유학의 꿈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고 무성하던 머리카락도 심리적인 압박감 때문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암흑 같은 시절 뒤에 더 고통스런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비록 시험에 떨어졌지만 처음 대학원을 들어 갈 때 나에게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지도 교수의 덕분으로 LA에 있는 대학으로 전학을 할 수 있었고 오히려 샌드에고 보다 좋은 조건으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LA에 와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연구에 좋은 조건으로 작용했지만 한편으로는 보다 전문적인 도박의 세계에 내가 가깝게 다가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연구비를 받는 월초가 되면 LA에 있는 카지노를 찾아가 책을 사야할 돈으로 도박칩을 바꾸었고 새벽녘 도박장을 나설 때는 남는 것이라고는 후회와 자책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것들 뒤에 그칠줄 모르는 미련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연구비를 날리고 여러개 있던 크레딧카드에서 찾을 수 있는 돈을 모두 꺼냈고 학교에서 합법적으로 받을 수 있는 융자까지 털어서 도박을 다녔다. 순간 2만달라를 따는 때도 있었지만 불과 며칠이면 그 돈은 나에게서 떠나가 버렸다.

도박에 대한 집착은 계속되어 학교에 내야할 학비도 내지 않았고 한국에 있는 집에는 차사고가 났다고하여 돈을 송금해 달라고 해서 도박에 사용했다.

학교에 가서 책을 대하면 학업에 대한 불안감과 압박만이 머리를 짓눌렀고 그 압박은 너무도 강했다. 그런 압박이 나로 하여금 하루라도 빨리 도박의 세계를 떠나게 하는 것으로 작용하지 않고 도박으로 돈을 따서 빚을 갚아야 한다는 어처구니없고 불가능한 망상만을 갖게 하였다. 당시에는 이런 생각이 전혀 망상이라고 느껴지지 않았고 내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구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미 연구비로 나온 돈은 도박으로 날렸고 크레딧카드에서도 더 이상 쓸 돈이 없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자연히 미국에 와 있던 여동생의 생활비까지 도박장으로 가져가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뚜렷한 사용처도 없으면서 끝도 없이 돈을 가져가는 일이 계속되자 마침내 동생도 내가 도박을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동생도 부모님에게 말하지 않았고 돈이 필요할 경우 거짓말로 용도를 둘러 댔기 때문에 한국의 집에서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도박 중독자에게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말기 증상을 당시에 나는 겪고 있었다. 도박의 중독 증세가 심해지면 자연히 도박을 은폐하고 도박에 필요한 돈을 만들기 위해 거짓말을 하게 되며 심할 경우 범죄 행위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더 이상 동생의 통장에서 돈을 꺼낼 수가 없었다. 학교는 2주일째 나가지 못했고 식물인간처럼 물만 마시며 살면서 머리속은 어지럽게 맴도는 카드의 무늬로 가득차 있었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다가 잠시 도박을 잊은 때가 있었다. 도박을 계속하려고 해도 돈을 구할 수 없었고 그런 중에 90년 초에 연구를 계속하여 논문을 제출 할 수 있었다.

다행히 논문은 지도교수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 이 일이 계기가 되어 한동안 도박을 떠날 수 있었다. 연구비를 받으면 도박으로 진 빚을 갚기가 바빴고 일정하게 받은 돈으로 그동안 진 빚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그러나 4월이 시작되면서 다시 도박이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도박이라는 고치기 힘든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갚아야할 빚이 쌓여 있었지만 연구비를 타면 바로 도박장으로 달려갔고 한 달 치 생활비를 모두 날린 후에는 다시 비참한 생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재정적으로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한국에 갔다. 당시에 남에게 진 빚과 카드에 쌓인 빚이 모두 3만 달러에 이르렀고 이 돈을 갚을 방법은 도박으로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에는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한국에서 돌아온 아들이 도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부모님은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 전해 주라고 1만달러를 손에 쥐어 주었다. 도박은 도박성을 마비시킨다. 또한 도박을 하기 위해 저지르는 비도덕적이고 반사회적인 행위는 모두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난 문제들이다. 부모님이 전해달라고 준 1만달라의 돈도 도박으로 머리속이 가득찼던 나에게는 이미 타인의 돈이 아닌 도박 테이블에 놓여져야 할 돈으로 생각되었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아무런 주저도 없을 정도로 도박이라는 병에 깊이 빠져 있었다.

빚은 계속 쌓여만 갔고 그 빚을 갚는 유일한 방법은 부모님이 전해주라고 준 돈을 가지고 도박판에서 돈을 따서 갚는 길 뿐이었다. LA 공항에 내려 근처의 카지노로 달려 갔다. 처음에 1만달러로 시작된 도박판은 운이 좋아 1만 4천 달러로 늘어났고 머리 속에는 금방이라도 돈을 따서 그동안 생활을 짖 누르고 있었던 빚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돈은 손에 쥔 모래알이 빠져나가듯 도박판의 테이블로 빨려들어 갔고 남은 7천달러를 가지고 라스베가스로 향하는 악순환의 길에 다시 들어 설 수밖에 없었다. 2박3일에 걸친 라스베가스의 도박은 계속되었다. 나의 의지로 도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무엇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은 흘러갔다. 이렇게 며칠을 보낸 후에 내 수중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5센트 동전하나 내 주머니에 남아 있지 않았다.

몇 십 달러 안남은 돈으로 개스를 넣고 뜨거운 사막 길을 달려 LA로 오는 길은 지옥으로 향하는 길과 같았다. 분명 나를 파멸로 이끄는 라스베가스로 가는 길은 눈앞에 어른거리는 무수한 지폐들로 가슴 부풀어 있었는데 도박을 끝내고 LA로 오는 길은 죽음과도 같았다. 도박장의 현란한 불빛 속에서도 한 번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던 논문에 대한 걱정이 앞섰고 내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힘에 의해 다시 도박의 비참한 노예가 되어 돌아오는 길은 걷잡을 수 없는 자괴감이 가득했다. 이제는 죽는 일만이 내게 남아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80마일로 달리는 차의 핸들을 조금만 꺾으면 가지고 있는 모든 고통과 근심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라스베가스의 절망도 나를 죽음으로 몰아 넣지는 않았다.

LA로 돌아와 크레딧카드로 몇푼 안되는 밥값을 지불하고 나니 다시 살아 나겠다는 생각이 생겨났고 도박의 미련은 마음 저 밑에서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이 무엇보다도 앞섰다. 학교는 벌써 한달 반 이상을 가지 않았고 여기저기 아는 친구들로부터 돈을 빌어 도박장을 전전했다. 그러던 중에 한국에서 어머니가 오셨다. 어머니는 착실하게 공부 잘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 아들이 학교도 빠지고 보내준 돈은 어디에 쓰는지도 모르게 탕진한 것에 대해 무엇보다도 궁금해 하셨다. 몸은 돌보지 않아 야위어진 몸으로 어머니를 만났고 그런 어머니에게 아무런 이유를 댈 수도 없었다. 어머니에게 도박을 했다는 말을 해서 실망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았다. “암에 걸려서 학교도 가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 다녔습니다. ”이 말이 왜 나왔는지 모른다. 다만 그 순간을 모면하려는 얄팍하고 사악한 마음에 아무런 주저 없이 내 입에서 이 말이 튀어 나왔다.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니에게 평생 가장 크나큰 슬픔이 될 말을 단지 도박을 은폐하기 위해 쉽게 말할 정도로 나의 도덕성은 마비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새벽이 가까워도 눈물을 그칠 줄 모르셨다. 어머니가 흘리시는 눈물을 보면서 마음속에는 진정 잘못했다는 후회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불과 하룻밤의 일이었지만 어머니에게는 슬픔으로, 나에게는 모멸감으로 기나긴 시간이었다.

새벽이 되자 그나마 타락 중에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던 나의 양심은 어머니에게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도박으로 지내온 나의 지난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머니에게는 도박에 대한 질책보다는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 돌아 왔다는 안도감이 더욱 강하게 자리하였다.

어머니는 그동안 내가 진 빚을 모두 갚아 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나는 이제 나를 얽어매고 있던 모든 것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런 나의 생각이 너무도 순진했고 도박이라는 엄청난 질병을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빚을 모두 청산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에게 친구로부터 꾼 돈을 갚겠다는 명목으로 2천 달러를 더 요구해서 도박에 대한 미련을 충족시켰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변한 것이 있다면 도박을 조직적으로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한정된 시간에 한정된 금액만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낮에는 연구실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밤이 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도박장을 드나들었다. 이때 정해 놓은 규칙이 도박은 11시까지 만하고 돈은 5백달러를 한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덕분이었는지는 몰라도 1만5천 달라의 돈을 딸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돈이 모이자 더 큰판에 가서 도박으로 잃었던 돈을 모두 보충하고 하루라도 빨리 도박과의 인연을 끊자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는 다시 많은 빚을 안은채 처참하게 끝났다.

그러던 중에 미국 단도박 모임을 알게 되었다. 도박이라는 치유하기 힘든 병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격려하는 가운데 도박을 끊는 모임을 말한다. 그 모임에서 발행하는 책자를 보는 순간 모두 나의 이야기처럼 생각되었다. 도박의 속성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도박은 치료해야할 질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 모임에 서너차례 나가면서 도박에서 점점 멀어져 갔으며 논문도 발표했고 시험에도 통과 했다. 당시에는 이미 차를 팔아 버렸기 때문에 9개월째 차 없이 생활했고 용돈은 여동생이 관리하여 하루에 10-20달러씩 타서 썼다.

시험에 통과함으로써 공부에 대한 걱정은 덜 수 있었고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찾는 듯 했다. 그러나 이런 것도 잠시 뿐이었고 UC버클리에서 있었던 연구발표에 갔다가 여행으로 들뜬 마음을 이기지 못해 샌호제의 도박장을 찾아간 것이 시작이 되어 연구비와 경비를 모두 날리고 3일만에 돌아와야 했다.

또다시 도박의 수렁에 빠져 들었다. 내 일생에 있어서 가장 비참한 도박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차가 없었기 때문에 택시를 타고 도박장을 찾았고 연구비로 받은 돈을 모두 잃은 후에는 내가 돈을 땄을 때 팁을 주었던 딜러, 거지들에게 구걸하다 싶이 버스값을 마련해서 돌아 왔다.

이미 거처할 아파트도 도박으로 없어졌고, 잠은 학교 사무실에서 잤다. 몇천 달러로 시작한 도박이 돈을 잃으면 불과 1-2 달러가 오가는 작은 판에서 참담한 심정으로 그동안 쏟아 부었던 돈의 액수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에 도박장 밖으로 나가면 숨막히는 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때는 돈이 없어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을 것을 찾기도 했고, 새벽버스를 기다리면서 마분지를 깔아 놓고 찬 새벽 공기에 몸을 맡기고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공부는 계속하여 밤에는 충혈 된 눈으로 도박에 몰두하는 박사과정의 학생이라는 자리에 바로 서 있었다.

92년에는 교수의 추천으로 유럽의 컴퍼런스에 참석하여 그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 때에 체류비와 여행에 필요한 경비가 나왔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스위스 카지노에서 모두 날려버렸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유럽 체류 비를 도박으로 잃었기 때문에 교수를 볼 면목도 없었고 어머니가 갚아준 빚은 다시 시작된 도박으로 몇만 달러로 불어났고 이제 한국에서 가져올 돈도 없는 극한 상황이 되었다. 유럽에서 돌아온 나는 자살을 결심하고 학교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한발만 내디디면 죽음으로 이어지는 절박한 상황에서 정말로 죽을 각오를 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절박한 상황에서 번개처럼 떠오른 생각은 한국계 은행으로부터 아버지의 크레딧카드에서 돈을 꺼낼수 있다는 생각이 났던 것이다. 도박이 주는 참담함 때문에 죽으려고 했던 내가 우습게도 아직까지 도박을 할 수 있다는 실날 같은 희망이 나를 다시 죽음에서 내려오게 하였다. 그 후의 일은 지난날의 연속이었고 생활은 더욱 비참하여 학교사무실에도 들어가기가 힘들어 창고에서 물만 마시고 사는 날도 있었다.

어머니가 다시 미국에 오셨으나 나는 도박으로 성공하겠다는 말을 하면서 더 이상 자식으로 생각지 말라고 애원하였다. 밤새도록 눈물겨운 어머니의 설득이 계속되어서야 조금씩 내가 처한 현실을 이성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원대한 꿈을 품고 학문의 세계에 뛰어 들었던 .희망에 찼던 나의 모습은 간곳이 없고 도박을 향한 광기를 갖은 비참한 인간이 되어 어머니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그 순간 몇 해 전 미국 단도박모임을 기억해 내어 다시 모임을 찾게 되었고 다행히도 LA한국 단도박 모임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서 도박을 중단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고마운 단도박 한 협심자를 만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1992년 9월 18일 마지막 도박을 끝으로 단도박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도박은 나의 의지로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갖게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도박을 중단할 수 있다는 어떠한 자신감이 생겨났고 도박의 유혹도 점차 극복할 수 있었다.

도박이라는 치료하기 힘든 정신병에서 서서히 벗어나면서 나의 도박성도 점차로 회복되었고 모임을 통해 도박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

이제는 박사학위도 받았고 도박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다만 이런 기회를 통해 밝히고 싶은 것은 도박은 완치가 불가능한 정신의 병이고 자기 스스로 이겨내기 힘든 병이라는 사실이다.